인터넷말씀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

임보순 0 652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마21:12-17)

저는 어릴 때 친구의 집에서 보았던 빨래 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 친구의 집 마당에는 10m나 되는 큰 빨래 줄이 있었는데 그 빨래 줄은 강철로

되어 있는 줄로서 집안에 있는 석가래와 마당 끝에 있는 대추나무를 연결한 줄입니다.

그리고 10m 되는 긴 빨래 줄이기에 중간에는 긴 장대로 받침대를 해서 늘어지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집에 갈 때마다 대추나무에 묵인 빨래 줄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대추나무에 묵인 강철 빨래 줄이 대추나무의 살을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추나무가 자라면서 강한 철사가 대추나무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러자 대추나무에 상처가 생기고 나무에서 진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더니 흐르던 진물이 마르면서 대추나무는 아주 흉한 흔적만 보이고 대추나무에 감긴 강철이 보이지 않게 속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대추나무를 볼 때 마다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너는 더 대추나무가 보이지도 않느냐? 고

빨래 줄을 다시 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아버지는 강철 빨래 줄을 다시 매려고 하면 너무 힘들다면서 안된다고 그래도 대추나무는 죽지 않는다고 저 대추나무 아니라도 다른 대추나무가 많아서 괜잖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가 태풍이 한번 심하게 불었는데 그 태풍으로 대추나무가 부러졌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는 성장하는데 빨래 줄이 고정되어 있었기에 멀쩡하던

대추나무가 죽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뱀은 일정한 주기가 되면 닳고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로운 몸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뱀이 다니다가 철망이나 가시에 상처를 입고 그 상처가 덧나면 그 상처

때문에 껍질 벗기가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껍질 벗기에 실패하는 뱀은 결국 그 껍질에 갇혀서 죽는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끝임 없이 의식의 전환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하고 끝임

없이 변화를 시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도 교회도 민족도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도퇴 되고 사라지고 맙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

루터의 개혁의 슬로건을 내건 교회가 리폼더 쳐지라고 합니다.

리 폼 다시 폼을 갖추어가는 것이 개혁교회입니다.

교회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요 주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목적을 회복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예배공동체입니다.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요 교회개혁 또한 예배의 개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왜 올라갔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올라갔습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희생양을 준비했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의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예배 공동체가 시장터가 되어 버린 것을 보고 예수님이

성전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돈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면서 성전을 개혁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성전안에 매매하는 자들이 들어왔고 돈바꾸는 자들이 들어왔고 비둘기 파는 자들이 들어왔습니까?

처음에는 동기가 순수했고 하나님께 더 잘 예배드리기 위해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시작된 일들이 그 뜻이 변질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인이 되면 누구나 일년에 한 번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제사에 드릴 제물은 그 사람의 형편에 따라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올라갈 때 반세겔의 성전세를 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 시골에 있는 사람이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몇 일을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 외국에 사는 사람이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성전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양이나 소나 비둘기를 가지고 올라오다가 보면 병이 들고 죽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 한쪽 귀퉁이에 흠없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준비해 두었다가 멀리에서 온 사람들이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기 전에 제사장이 검사를 해서 흠이 있는 것이나 병든 것이나 문제가 있는 것이 있으면 불합격을 시킵니다.

그러면 부득불 성전에서 준비한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의도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갈 때 성전세를 내어야 하는데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의 초상이 담긴 돈이 통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초상이 담긴 이 돈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어서 유대인의 화폐로 바꾸어서 드리도록 환전소를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목적이 순수했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뜻이 변질이 되면서 성전이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 하나님의 성전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하나님께 드릴 성전세를 환전하는데 턱없이 많은 수수료를 챙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준비한 제물들은 시중에서 파는 가격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시중에서 제물을 사서 드릴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성전에서 합격품으로 인정한 그 제물로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 입구에서 제사장들이 제물들을 검사하면서 다 불합격을 시킵니다.

제물에 흠이 있다고 제물이 너무 말랐다고 제물이 병이 들었다고 딱지를 놓습니다.

그러면 제사는 드려야 하고 제물을 없고 그러면 할 수 없이 성전에서 준비한 제물을 비싼 값으로 사야 했습니다.

그리고 불합격 판정을 받은 제물은 어쩔 수 없이 성전에다 싼 값으로 팝니다.

그러면 싼 값으로 들어온 불합격품이 성전 뒷문을 통하여 정품으로 둔갑을 합니다. 제물을 헐값으로 사서 비싼 값으로 파니 돈벌이가 되는 것이죠

그러기에 퇴자를 많이 놓으면 놓을수록 돈을 버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한 제물이라고 해도 성전 문 앞에서 불합격을 받습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준비한 제물을 보면 흠이 있는 것도 있고 병든 것도 있고 온전하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제사장이 합격품으로 인정한 제물이기에 이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성전과 제사장들이 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러한 매매하는 자들과 비둘기파는 자들과 환전하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엎으며 성전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예배공동체에서 예배드려야 할 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이권에만 혈안이 되었습니다.

예배공동체에서 예배드려야 할 백성들이 제물 때문에 옥신각신하느라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해야 할 예배가 짐승의 소리로 가득하고 인간의 소리 인간의 냄새로 가득한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을 개혁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떠합니까?

제사는 제물이 죽고 내가 죽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죽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나의 시간 나의 물질 나의 자아와 교만 나의 이성이 죽어야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만 사모하면서 엎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이란 닝겔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입원하면 닝겔을 맞습니다. 그리고 기력이 약해져도 닝겔를 맞습니다.

그런데 닝겔은 자기 몸보다 높은 곳에 두어야 합니다.

닝겔을 자기 몸보다 낮은 곳에 두면 닝겔이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내 몸의 피가

피가 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목사에 대해서 그리고 예배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서느냐? 에 따라서 우리들의 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고 교회를 우습게 생각하고 목사를 내려다보고 예배를 하잖게 보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되고 피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교회 올 때의 자세 예배드릴 때의 자세 말씀을 들을 때의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자세로 개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를 주옵소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까? 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만 사모할 때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합니다.

주님이 원하는 예배의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16절을 보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신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젖먹이 아이처럼 서는 것이 올바른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기도공동체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을 둘러엎으시고 하신 말씀이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했는데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시고 성전에서 나타난 현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에 대해 히브리서기자는 해석하기를 히10:19-20절에

그르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고 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요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주시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이 세상은 사탄마귀와의 싸움이 일어나는 전쟁터요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대항하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기도의 무기를 들지 않으면 싸움에서 지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비젼을 보게 되고 환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담을 넘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요 기도의 소리가 꾾어지지 않는 교회가 소망이 있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치유가 있는 곳이요 회복이 있는 곳입니다.

영적인 소경이 눈을 뜨게 되고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이 강건해 집니다.

그래서 교회는요 병든 자도 일어나고 문제도 해결되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고 가정이 회복되는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이 쏟아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방언이 터지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는 말씀 처럼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하늘의 신령한 은사들이 쏟아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한 역사는 예배가 회복될 때 기도가 회복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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